Summertime - Janis Joplin
제니스 조플린의 짧은 이야기..
여성 락커의 시조로 Janis Joplin을 뽑는데 이견을 가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 전설적인 재즈 가수 빌리 할리데이가 회자되기도 한다.)
그는 남성이 지배하는 락 계에서 상업적, 비평적 성공을 거둔 최초의 여성이다.
하지만 매우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성격 탓에 그는 방탕한 생활에 빠졌고
약물 중독 때문에 27살이 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20대라는 너무 젊은 나이에 죽은
그는 "요절=천재"라는 공식에 맞추어져 락 계의 우상화라는 제단에 그 신상이 세워졌다.
그의 사후에 발매된 음반 "진주"는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한다. 또 "나는 산채로
묻혀요."라는 제목으로 재니스 조플린의 전기가 출간되고, 그의 전기 영화 "The Rose"가
베트 미들러Bette Middler주연으로 큰 인기를 누린다. 우연히 일치였겠지만 동시대의
또 다른 천재 지미 헨드릭스와 도어즈의 짐 모리슨도 모두 그와 똑같이 27살에 요절을 하였다. 사람들은
지미 핸드릭스, 짐 모리슨, 재니스 조플린... 이 세 명의 록커를 "위대한 3J"라고 말하며 순수의 표상처럼 이야기한다.
남성 중심의 세계에 던져진 세이렌(Sirens)의 마녀
록 음악이 대중음악의 한 주류로 자리잡은 시기는 불과 5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으며 그 기간 동안 록 음악의 역사는 위대한 저항과 승리의 시간이자 동시에 패배와 굴종의 시간이기도 했다. 많은 음악평론가들이(특히 국내에서는 '강헌' 같은 음악평론가에 의해) 록(rock)이 마치 민중가요이자 저항가인 양 높이 추켜세워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어쩌면 꿈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록 음악이 반항적 메시지 전달자로서의 전성기는 사실상 60년대로 한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후 니르바나(Nirvana)의 커트 코베인 같은 인물은 일종의 오파츠(Out Of Place ARTifactS)적인 현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철저히 상업적이고 체제 내 반항적인 구두선(口頭禪)에 멈춰 있었다. 그 대단했던 록의 황금기를 빛낸 록커들 중에서도 사람들은 압축해서 '3J' 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 3J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그들은 앞서 이미 다룬 바 있는 The Doors의 짐 모리슨(Jim Morrison),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그리고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제니스 조플린(Janis Joplin)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도 미국은 아직 대통령 선거의 승자가 누구인지 결정되지 않았다. 이른바 미국판 '고부갈등(고어와 부시)'이라고도 할 수 있을 이번 선거는 미국이란 나라가 아직까지 WASP가 지배하는 사회이자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 사회 내의 마이너리티(Minority)들에겐 아직도 그 문호가 닫혀있는 사회라는 것을 엿볼 수 있게 한다.(이 부분은 나중에 기회가 닿는 데로 '바람구두의 세상읽기'에서 다룰 것을 약속드린다.) 대통령 후보 중 한 사람으로 미국 백인사회 주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인물이자 보수적인 미국사회에서도 보수적인 지역인 텍사스 주지사 출신인 부시 후보를 살펴보는 것으로 제니스 조플린을 이해하는 한 축으로 삼는 것 역시 재미있을 것 같다.
미국에서 가장 완고하고 보수적인 남부의 한 주인 텍사스주에서는 작년(1999년)에 일단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흑인을 차에 매달아 찢어 죽이는 사건이 있었다. 이는 미국이란 사회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바라보는 것보다도 훨씬 더 보수적이고, 전근대적이자 소수에 대해서 관용적이지 못한 사회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의 일단에 불과하다. 제니스 조플린은 그런 미국 텍사스의 소도시 포트 아더(PORT ARTHUR)에서 태어났다.
텍사스에서 가장 못생긴 계집애에서 발퀴레로
제니스 조플린은 생전에 그녀 특유의 개방적 성격 탓에 성장기에 그곳의 완고한 분위기 로 인해 많은 갈등과 불만을 가지고 살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유난히 보수적인 텍사스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조플린은 어려서부터 별난 아이로 취급받기 일쑤였고,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낸 텍사스는 남성중심의 사회(가부장적)였다. 그림 그리기와 시를 좋아했으며 오데타와 레드벨리 같은 흑인 음악을 즐겨 들었다. 자신의 말대로 "주말이면 남자애들과 어울려 영화 보러가고 콜라나 좋아하는 텍사스 여자 아이들" 속에서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 그녀는 또래 친구들로부터 늘 따돌림을 당했고, 거기에는 못생긴 그녀의 외모도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친구 말을 들어보자.
순진한 애라서, 아마 우리 반에서 유일하게 경험이 없었을 거예요. 조플린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처녀였다고 확신해요. 그런데도 그 애는 무슨 대단한 경험이라도 해본 것처럼 굴었어요."
그녀는 그럴수록 점점 더 자기 속으로 파고들었다. 조플린은 이때부터 이 세상에 기댈 곳은 없다고 생각했으며 평생 이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점차 스스로를 힘들게 만드는 것에 익숙해졌다. 제니스 조플린은 18세 되던 61년 고향 텍사스를 떠나 휴스턴에서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5년간 여기저기 떠돌며 일하고 노래하는 고된 시절을 경험했다.
그녀는 이 기간 동안 세상살이의 힘겨움과 더러움을 절감했고 세상이 점차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아예 저버리게 되었다.(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믿음마저 없는 사람들은 체념하고 현실순응적인 태도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또한 자본주의가 바라고 또한 적극 퍼뜨리는 인간상이다. 이런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진보의 이상은 어둡다.) 희망을 버린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더러운 세상을 저주하거나 술과 약물에 젖어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것뿐이었다. 이것은 당시 록음악계 역시 남성중심의 세계였던 탓도 역시 크게 작용한다. 그녀의 말투는 점점 거칠어졌고 행동은 공격적으로 변해갔다. 오직 노래만이 그가 완전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